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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단심가(丹心歌), 이 시대 정치인의 좌우명이 되기를…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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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필자가 중학교에 입학한 철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고려 말기 인물인 이방원(李芳遠)과 정몽주(鄭夢周)에 대해 자주 언급하시며 “시류에 영합하는 이방원의 삶보다는 정몽주와 같은 의롭고 고상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이방원과 정몽주라는 이 역사적인 두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바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단지 그들이 주고받았던 유명한 시조(時調)인 ‘하여가’와 ‘단심가’의 내용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하여가’는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이 조선의 개국을 앞두고 고려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의 진심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읊은 시조이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단심가’는 정몽주가 이방원이 읊은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고려를 향한 마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전한 시조이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55세이고 이방원은 25세였다.

 

▲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고려 말기 충신 정몽주의 초상과 그가 쓴 단심가

 

필자의 삶에 좌우명으로 자리잡은 정몽주의 ‘단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유형을 단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하여가를 부르며 사는 자’와 ‘단심가를 부르며 사는 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방원 같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영리(교활)하게 살아가는 자와, 정몽주와 같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결단 아래 단심(丹心)을 품고 강직하게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당시 필자는 어린 시절이어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차차 이방원과 정몽주의 인물됨과, 그들이 남긴 ‘하여가’와 ‘단심가’가 바로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척도라는 나름의 구별된 의식이 싹트며, 정몽주의 ‘의를 향한 일편단심’의 기상을 흠모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삶의 좌우명으로 자리잡힌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비록 어린 중학생 시절이었지만 정몽주와 같은 ‘단심의 삶’을 살 것을 권면(勸勉)하신 담임선생님의 교훈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덕분(?)에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친구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이는 주변에 ‘하여가’를 부르며 사는 사람은 많은데 ‘단심가’를 부르며 사는 사람은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호불호를 분명히 하던 젊은 시절에는 ‘하여가’를 부르며 사는 사람과는 즉석에서 단절하는 치기(稚氣)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리 치워야 할 똥을 밟으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요즘은 웬만하면 토역(吐逆)을 불사하고 단절 대신 ‘불가근불가원‘의 지혜를 따라 이들을 곁에 둘 수 있음이 퍽 다행스럽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며 얻은 내공의 덕이 아닐까 여겨진다.

 

‘단심가’를 부르는 정치지도자의 출현이 절실하다

 

‘하여가’의 주제인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부르며 불의한 생각과 언행을 일삼는 관행이 사회 전반에 걸쳐 편만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다른 분야에 비해 정치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띠라서 여기서는 타 분야는 차치하고 가장 심각한 분야인 정치권만을 거론하고자 한다.

 

우리사회는 최근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이를 기화로 일부 정치인들은 권력에 빌붙어 정치적 이념을 쉽사리 바꾸는가 하면, 한편 당권에 부화뇌동하며 거짓과 선동과 모함을 일삼는 등 사리사욕을 위한 비리의 만연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이렇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여가’를 부르는 이방원보다는, 죽음 앞에서도 대의를 지키기 위해 ‘단심가’를 부르는 정몽주와 같은 의롭고 신실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이 절실하다.

 

이 ‘단심가’ 마지막 부분에 쓰여 있는 주요 문장은 “임 향한 일편단심”인데 ‘임 향한’은 당시 군주시대 국가의 주인인 임금을 향함이고, ‘일편단심’은 사전적 해석에 의하면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군주를 위한 신하의 변치 않는 충성스러운 마음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민주’ 시대이다. 문자 그대로 오늘날 국가의 주인은 모름지기 국민이다. 따라서 국민을 위한 충성스러운 공복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그러한 정치지도자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얼마 전 대선을 겪으며 느낀바, 이는 국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신성하고 중차대한 일이지만 선거판 자체는 추악하기 그지없고, 후보마다 허다한 공약들을 남발하고 있지만 이를 책임질만한 믿음직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충성’의 대상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

 

세상이 온통 어둠에 싸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암담한 상황 중에도 비록 희미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윤석열 후보의 “나는 조직에 충성할 뿐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과거 검사시절 신념에 찬 발언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언은 그가 여주지청장 시절이었던 지난 2013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수사 과정에 검찰 수뇌부의 외압이 있었던 것을 폭로하면서 한 용기 있는 발언이다. 윤 후보는 당시 “(윗선의)지시 자체가 위법한데 그것을 어떻게 따르겠느냐”며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를 두고 ‘윤석열의 단심가’라 명명하고 싶다. 

 

그는 이 발언 이후 1개월 정직 징계에 이어서 대구고검 검사, 대전고검 검사로 좌천되는 ‘선죽교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이 말에 대해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검사의 오늘 발언이 두고두고 내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라고 적은 바 있다.(2013. 10. 21)

 

또한 얼마 전 윤 후보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 ‘충성’의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충성이란 그 대상이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지 그 나머지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통해 그의 변함없는 신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가 현재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어언 7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신념이 일관되게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정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대했던 국민의 지지율이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정치인이 선거를 앞두고 국민 앞에 수많은 공약을 펼쳐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그 공약은 지켜질 때만이 국민으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는 신념의 노래가 행동으로 지켜지지 않을 때 그 노래는 ‘단심가’에서 ‘하여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등소평이 말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같은 의미다.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말이다. 이렇듯 정치인의 다수가 목적을 위해서는“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하여가’를 불러대는 이 시대에, 공직자로서 정직(停職)과 좌천이라는 사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국가와 국민 앞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을 노래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신념에 찬 발언이 조국과 국민을 위해 변함없는 ‘이 시대의 단심가’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태양이 있는 밝은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밤일수록 밝게 보이는 것이 별이다.

 

요즘같이 눈앞이 캄캄할 때 윤석열 대통령이 불렀던 ‘단심가’의 곡조가 하늘의 별이 되어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밝히 비춰줄 것으로 믿는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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