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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국민통합은 노래로 이루어야 한다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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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형제가 집 앞마당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이 땅따먹기 놀이는 땅에 자기 소유의 범위를 정해놓고 납작한 돌을 발끝으로 차서 상대방의 땅을 빼앗는 놀이이다. 

 

혹, 내 땅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면 갑자기 분위기가 자못 심각해지는가 하면, 만일 부정한 행동이 보이면 멱살을 잡고 싸움까지도 불사한다.

 

그러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어머니가 “이제 그만 들어와서 손 씻고 저녁 먹어라”고 말씀하시면 하루 종일 수고하여 빼앗은 소중한 땅을 한순간에 버리고 집으로 달음질쳐 들어간다. 그리고는 한 상에 둘러앉아 평화롭게 음식을 나눈다. 이로 인해 형제가 하나임을 실감한다.

 

누군가 “세계는 불타고 있다”라고 했다.

 

나라 안이 싸움으로 불타고 있다. 정치권이, 시민단체가, 심지어는 종교집단과 가정까지도 온통 싸움으로 불타고 있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으로 불타고 있다. 특히 남과 북의 싸움판은 북의 핵(核) 도발 위협까지 존재하는 가장 화력이 센 불도가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땅따먹기’이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재물, 권력 등 부강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땅이란 조물주의 것이지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하루 종일 치열한 싸움으로 빼앗은 소중한 땅을 저녁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부름에 모두 포기하고 형제가 한 상에 둘러앉아 평화롭게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개인 간의 싸움, 여야 간의 싸움, 남·북 간의 싸움 등 모든 싸움은 결국 말로만 으르렁거리며 을러대다 머지않아 망각(忘却)의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곧 소강상태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 이유도 결국 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절실한 시대이다. 

평화가 싸움을 물러가게 한다.

 

과연 누가 이 헛된 싸움판에서 혈안이 되어 있는 형제를 평화의 식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어머니밖에 없다. 이 어머니란 바로 ‘문화’이다. 문화가 인간 삶의 모체(母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견인차가 곧 ‘예술’이다.

 

필자는 이 ‘예술’을 쉽고 정겹고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노래’라 칭하고 싶다.

 

우리가 원하는 남북통일도 돈이나, 정치적 술수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노래’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노래’는 인간 정서(情緖)의 수원지(水源地)이다. 

 

정서는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노래’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좀처럼 야욕(野慾)의 외투를 벗으려 하지 않는다. 야욕은 다툼을 불러일으킨다.

 

상대방이 무력적일수록 우리는 더욱 평화적이어야 한다. 이는 정치적 야욕을 위한 술수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 본연의 의지와 노력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노래’를 가슴으로 불러야 한다. 평화를 위해 더욱 크게 불러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평화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한다. 그리고 이 평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바로 ‘노래’인 것이다.

 

찬송가 가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찬 468장)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가 노래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모두가 권력과 물질 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정신문화를 살찌울 노래를 팽개쳐버린 것이다. 이는 싸움만 일삼는 역대 문맹(文盲)의 위정자들이 벌여온 실정(失政)에 기인한다.

 

이근배 시인의 『잔』이라는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무엇하러 금세기에 태어나서 빈 잔만 들고 있는가

노래를 잃은 시대의 노래를 위하여 모여서 서성대는가……”

 

오늘 우리는 다시 노래를 불러야 한다.

평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마음에 노래를 불러야 한다.

모여서 서성대지 말고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불러야 한다.

 

집단이 모이면 혼자서 못하던 과격한 행동을 한다. 군중심리에 의해서다. 그러나 모여서 합창(合唱)을 하면 그 힘은 감동으로 전환된다. 

 

과거 전쟁을 치루던 극한 상황의 보스니아는 10만 시민합창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었다. 소란(騷亂)과 포악(暴惡)이 아닌 평화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꾼 것이다.

 

지금도 보스니아는 매년 10만 시민합창이 관광 상품이 되어,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니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 민족인 우리나라로서는 열등감까지 느낄 정도다.

 

과거 나치의 독일이 번창한 것은 합창을 좋아하는 국민의 특성을 히틀러가 잘 활용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 전투에서 독일은 러시아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 동안 봉쇄했다. 

 

1942년 8월 9일 밤, 쏟아지는 독일군의 포탄 속에서 스탈린은 “지금 레닌그라드에서 필요한 것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듣는 것”이라는 결단을 내린다. 스탈린은 "현재 독일군에 포위되어있는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하는 것은 나치에 대한 저항의 행위이자 승리를 위한 선전(善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도시에 남아있던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 단원 18명과 음악 교사, 전직 연주자들이 함께 모여 연주에 동참했다. 연주장소인 필하모니 홀 안팎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고, 연주는 스피커를 통해 레닌그라드 전역에 울려퍼짐으로 그들은 하나가 되어 그 후 독일군이 레닌그라드에서 물러가기까지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렇듯 노래는 위대하다.

 

노래는 평화를 이룬다,

노래는 국민을 하나되게 한다.

 

국민통합은 정치나 물질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국민통합은 노래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Schostakowitsch: 7. Sinfonie (»Leningrader«) ∙ hr-Sinfonieorchester ∙ Klaus Mäkelä

(출처=hr-Sinfonieorchester – Frankfurt Radio Symphon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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