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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니들이 ‘애국(愛國)’을 알아?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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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먼 이국땅에서 자라는 손주들을 통해 느낀 ‘애국의 맛’은 신구 선생의 ‘게 맛’보다훨씬 맛있다.

 

몇 개월 만에 L.A를 방문하니 두 명의 손자, 손녀가 나를 가장 반긴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 '엘리(Ellie)'는 계집아이라서 그런지 늘 애틋하다.

 

집에 들어서서 엘리에게 선물이랍시고 한국에서 가져간 머리핀과 예쁜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을 건네주니 "할아버지, 잠깐만~" 하고는 책상에 앉아 한동안 뭘 끄적인다. 그리고는 10분쯤 후 "할아버지, 이거 선물~" 하면서 내게 A4용지 한 장을 건네는데 받아보니 방금 즉석에서 그린 태극기 그림이다.

 

평소 내가 한국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아마도 태극기 그림을 그려주면 할아버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 미국에 사는 손녀 '엘리(Ellie, 초등학교 1년)'가 그린 태극기

 

앞으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아이라서인지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치고는 꽤 잘 그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로서 태극기를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 내로라하며 애국자 연(然)하는 정치인이나, 소위 '태극기 시위'에 나서는 수많은 애국자(?)들, 그리고 애국열에 불타 밤, 낮 가리지 않고 SNS에 정치 비판 글을 올려대는 소위 정치 낭인(浪人)들 중에 과연 즉흥적으로 태극기를 이렇게 정확히 그릴 수 있는 분들이 몇 명이나 될까?

 

태극기 모서리에 있는 '4괘(건, 곤, 감, 리)'의 의미는 차치하고, 이를 즉석에서 정확히 그려내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미국 초등학교에서 매일 아침 실시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매일 조회 시간마다 성조기 앞에서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친다. 그러나 엘리 남매의 경우, 집에 돌아오면 우리말 사용은 물론 이렇듯 태극기나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주입 시키기 위해 애쓰는 엄마 아빠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칭찬을 넘어 고맙기까지 하다.

 

이어서 얼마 전 학교에서 실시한 악기 만들기 대회에서 ‘사발면’ 용기와 ‘나무젓가락’을 소재로 1등상을 받은 ‘장구’를 치며 할아버지를 환영해 주었다. 이러한 어린 손녀의 모습에서 단순한 재롱보다는 진정한 애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에 내정된 ‘안경환’의 경우,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조국으로 섬기도록 강요받게 되겠지만 너에게는 아메리카라는 또 하나의 조국이 있다. 굳이 대한민국만이 너의 조국이라고 고집하지 않겠다. 아비는 조국 대신 타국을, 사회적인 삶 대신 개인적인 삶을 동경해왔다"라고 말한 것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공표한 것에 비하면 엘리의 부모는 최하 국무총리 후보가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해보았다.

 

요즈음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일부 국회의원과 국민 중에는 우리 애국가를 친일파 음악인이 작곡한 곡이라 하며 온 국민이 지금껏 벅찬 가슴으로 불러온 애국가를 바꾸자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은 독일 음악가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가 작곡한 국가(國歌)지만 지금까지 존중하며 불러오고 있다. 그뿐인가, 그들은 국가인 ‘기미가요’를 국기(國旗)인 ‘히노마루(日章旗)’와 함께 일본의 양대 상징으로 여기며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심지어 할복(割腹)까지도 서슴치 않는 민족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자주 글을 올리며 애국을 외치는 분이 미국에 사는 교포들을 향해 과거 친일파 이완용과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일컫는 글을 보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같은 교회에 출석하며 알게 된 4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생각난다. 그 여성은 낮에는 LA 다운타운 뒷골목 ‘자바시장’의 옷가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자정이 넘도록 봉투를 붙이는 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분이었다. 그녀가 추석 즈음에 한국에 사시는 노모에게 500 달러를 송금하기 위해 한인마켓 내 ‘고국 송금취급소’에서 동봉할 편지를 쓰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가슴 뭉클한 심정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이렇듯 지금도 교포들이 힘들게 노동해서 번 돈을 고국에 보내는 액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그 통계를 찾을 수 없어 정확한 액수를 표기하기 어렵지만 매년 엄청난 거액일 것으로 추정된다. ‘재미 한인 50년사’에 보면 1910년 이후, 해방되던 1945년까지 재미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낸 액수는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이 액수는 오늘날 가치로 7,000만 달러(약 910억원)가 넘는 거액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본다면 과거 상해 임시정부는 미국교포들이 보낸 애국 성금이 아니고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재미교포들을 ‘매국노’라고 말하는 자칭 ‘애국자’들은 실제로 어떤 애국을 하고 있는가? 그런 분들에게 필자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니들이 ‘애국’을 알아?'

 

문득 대통령께도 한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타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포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애국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우리 가곡 중 다시 듣고 싶은 곡이 떠오른다. 민족음악가 홍난파 선생이 작곡하고 김형준 선생이 작사한 ‘봉선화’다. 이 곡은 과거 일제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대표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불렀던 소프라노 김천애 선생은 오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음악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은 물론, 우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진(先進)들을 친일파라는 틀 속에 가두어 정죄하려는 자칭 애국 후손들을 필자는 차라리 매국노라 칭하고 싶다.

 

 

김형준 작시, 홍난파 작곡 '봉선화' /  소프라노 김천애. (1972년 LA 초청공연 실황)

 

김천애 선생은 성악을 전공한 필자 아내의 은사이기도 하다. 아내와 교제하던 젊은 시절 일주일에 한 번 레슨 받는 날이 되면 청파동에 사시던 김천애 선생 댁에 아내를 데려다주곤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본 칼럼 도입부에 인용한 글이나 사진이 본의 아니게 자식 자랑으로 비쳐져 혹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외부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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