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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칼럼]'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며 예술 모국어를 생각한다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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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조국 강산, 짓밟힌 백성들

찬바람 삭풍에 낯선 땅, 서러운 땅의 동포여

봉우리마다 타오르는 심장이여

 

영혼을 밝히는 햇불이여

동방의 빛이 되어라

일어나라,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오병희 작곡, 칸타타 ‘동방의 빛’ 가운데 ‘함성(喊聲)’의 가사이다.

 

정치가들은 새 출발을 할 때 국립현충원 등 호국 영령 묘소에 참배한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이나 문화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거꾸로 예술가들도  국가 의전 행사에 공연이 있다면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나 국가관에서 인식이 깊지 못한 것 같다.

 

▲  매현 윤봉길 의사상   ©문화저널21DB

 

실로 나라가 독립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영토의 '독립'은 이뤘으나 '문화'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모든 산업과 경제가 남의 것을 배우면서 커왔다. 서구 모방은  근대화에 필수 코스였고, 오늘의 큰 성장을 이뤘고  때론 기적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따라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물론 앞으로도 글로벌 통용을 위해선 선진에서 배울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따라만 하면 1등 국가, 주도권을 갖는 나라로 나가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선진국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독립적일 때, 자유적 시선(視線)의 사유(思惟)가 가능할 때. 그러니까 '수입 문화'나 '수입 철학'을 뛰어 넘어 설 때 만이, 독창적인 것이 가능하다. 남의 것을 쓰는 것은 좋지만, 내 것으로 착각해 대체 문화에 안주하면서 우리 것을 만들지 않는다면 영원히 문화 종속국이 되고 만다. 자기 나라 문화가 없거나 궁핍하다면 이건 후진국이다, 지역은 물론 국가가 자체 문화가 살아야 정체성도 살고 내수(內需)시장, 해외 시장도 개척된다. 우리가 전기밥솥, 자동차, 핸드폰 등을 먼저 시작해 만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처음 시작한게 몇 개나 되겠는가? 거의 절대적인 모방 기술력이 아닌가. 그런데 이변을 일으킨 것이 한류다. 정부가 한 것이 아니라 현장의 젊은 세대와 사업가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세상은 문화로 소통하고 문화로 하나가 된다. 비대면으로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때문에 오래 전의 기술 숙련과 기능의 역할 시대를 지나 창조 콘텐츠 시대가 왔다. 문화가 정신 토양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독창성있게 만들려면 쾌적한 창조 환경이 필수다.그런데 창조 환경은 미흡하고 공공의 지원 역시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갖지 못하고 머문다. '될 만 하면', '이만하면 됐다'는 식의 한계성이 발목을 잡는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 달에 올려 지는 것 만큼은 남의 것을 복사하거나 재연에 목을 매서는 안된다. 호국 영령 혼(魂)의 제삿상에 우리의 것을 올리자는 뜻이다. 이제는 식민지 잔재에서 상당히 벗어 났으나 아직도 수입문화 구조의 지배가 절대적이다, 그래서 호국보훈의달 같은 국민 공감대가 충분한 행사에서부터 우리 것을 시작하는 게 효율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서양 ‘레퀴엠’보다 ‘씻김굿’을 잘 만들어서 내놓자는 것이다. 일반적인 콘서트에선 상관이 없겠지만, 목숨 바친 호국 영령들과 독립운동가 앞에서 예술 모국어(母國語)의 사용은 절대적일 수 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 제삿상에 피자, 스파게티, 비프 스테이크를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문화의 힘’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속성을 따져야 한다. 식민지하에서 문화를 뺐거나 강하게 억누르는 것이 정신을 뺐기 위한 것임을 누가 모르랴. 지금은 분명히 수입기가 지났다. 습득한 기술력으로 ‘모방’이 아닌 ‘독창성’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이유다. 콩쿠르 최다 우승국이지만.우승자들이 설자리가 너무 협소해 무대가 아닌 다른 일자리에서 생존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정치와 문화도 새 관계 설정이 필요한 때가 왔다

 

고정 불변 같은, 정치권의 지독한 문화 외면 현상은 그래서 국가 발전의 바퀴를 헛돌게 한다. 30대 젊은 당대표도 나왔다, 기존 정치 형태에 강한 변화의 요구다. 사람이 중요하다. 변화에 둔감한 공공은 자발성을 높이고 개인의 능력을 찾아 할짝 열어야 한다. 

 

그래서 이참에 정치와 문화도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소 닭 보듯, 강건너 불보듯 해서는 안된다. 정치가들이 문화를 모르고, 국민 의식을 높이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정쟁에만 빠진다면 갈등과 혼돈은 해소되지 않는다.

 

국민 의식을 높이는게 문화다. 소통도 문화다. 그러면 정치수준도 올라가고, 그래서 지난해 독일의 경우 예술가들을 위한 어마한 예산을 세우지 않았는가. 국가는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면서 말이다. 우리는 피부에 와닿지 않고 형식적인 것의 반복이다.정치가들은 모르고 예술가들은 아우성이다.    

 

예술이 신선한 충격을 주는 최고의 처방인 것을 알았으면 한다. 선진국에서 딴 것은 다 배우면서 유독 이건 정치권이 왜 배우지 않는 것일까. 이번 윤석열의 대권 행보 시작이 윤봉길 기념관이어서 관심을 갖게 한다. 두번째 발걸음은 예술의전당이면 좋겠다. 그럼 새롭게 정치권에 전례를 만드는 것이니까, 정치를 위해서도 좋고 문화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는가. 문화의 눈높이 시선을 키워 나가자는 것이다. 

 

▲ 예술의전당 기획 공연 평화 콘서트  © 문화저널21 DB


세상을 바꾸는 힘이 문화에 있다  

 

24일, 예술의전당에서 6,25를 앞두고 '평화 콘서트'를 한 것이 쳐음이라고 한다. 외국인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우리 예술가의 창조성이 고갈되지 않고, 생존 자체가 위협받지 않도록 정치권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뉴노멀(New Normaul)로 우리가 선진국으로 부상하는 찬스이자 강력한 시대적 요청이 아니겠는가. 정치가 변하는데 예술의 역할이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탁계석 한국예술비평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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