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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OA ART ASSETS] 최환승 ‘MINOA ART ASSET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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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 ‘그래피티’가 세계 문화를 힙 쓸 그날까지 오늘도 꿈꾼다

 

미술에서‘그래피티(Graffiti)’는 생소한 장르이다. 사전적 뜻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로 고대 동굴벽화나 암각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쓰고 그리는 충동적 본능적 행위에서 문화가 싹텄다. 

 

그래피티는 넓은 의미로 로마 뒷골목의 벽에 새긴 광고용 스크래치, 2차대전 때 전투에 임하기 전 벙커에 자신과 애인의 이름을 새긴 병사까지 포함한다. 현대적 의미는 60년대 미국 흑인 젊은이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고, 70년대 뉴욕 사우스 브롱스(South Bronx)에서 시작한‘태깅(tagging)'이 본격적이다. 

 

지금은 락카, 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이용해 공공장소나 벽에 그림을 그리는 문화를 가리킨다. 70년대 냉전 시기는 여러 제약으로 젊음의 에너지가 억눌려 있었다. 대표적 슬램가 사우스 브롱스는 젊음의 욕구가 분출하는 탈출구였다. 

 

▲ 최환승(崔煥昇) ‘MINOA ART ASSETS’ 대표  © 김동건

 

그래피티는 이후 '힙합(hip-hop)' 문화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한다. 힙합의 4대요소, 즉 랩(MC), 음악(DJing), B-Boy(브레이크 댄스)와 함께 자리 잡았다.‘힙합’은 1970년대 미국 뉴욕의 브롱스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춤과 대중음악으로부터 파생된 거리문화이다. 1990년대 들어 힙합은 전 세계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음악은 물론 댄스ㆍ패션ㆍ액세서리 등 분야에서 보다 자유롭고 즉흥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현재 그래피티는 힙합에서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그래피티 현주소는 걸음마 단계에 있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지난 3월 말에 발생했다. 어느 관람객이 존원(Jon Oneㆍ미국)의 5억짜리 작품을 훼손한 것이다. 이 사건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면서 오히려 그래피티를 홍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발맞춰 필자는 낯설은 분야를 낯익게 하기위해 황량한 벌판에서 꿋꿋이 제 길을 가는 최환승 대표를 롯데월드타워 전시장에서 만났다. 명함을 받아보니‘미노아 아트 에셋(Minoa Art Assets)' 대표(CEO)에 극동대학교 금융자산관리학과 겸임교수다. 예술(art)과 금융(finance)의 동행이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최 대표는 연세대(사회학과) 졸업 후 뉴욕으로 유학 갔다. 거기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치고 맨해튼으로 넘어가 금융브로커로 활동했다. 미국 증권협회와 금융감독원에서 승인한 주식, 펀드, 연금 등을 취급하는 금융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다양한 상품을 다뤘다.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에서 쌓은 명성으로 글로벌 금융그룹 AXA그룹 지역매니저(1998년)와 뉴저지주 지점장(2000년), 북동부지역 부사장(2002)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미국에서의 화려한 경력은 2004년 한국 알리안츠 생명에서 그를 스카우트해 상무로 임명했다. 이후 Nationwide Financial 뉴욕 맨해튼 지점장(2005년)을 거쳐 삼성그륩 해외 S급 핵심인재 33명 중에 뽑혀 삼성생명 전략채널본부(2007)에서 일했고, 다시 한국 알리안츠 영업채널 총괄 대표를 맡아서 채널 성장에 기여했다. 한마디로 미국ㆍ한국 금융계를 주름잡았다. 

 

최 대표는 미국에서는 현장(field)에서 뛰었고 한국에서는 주로 관리자로 일했다. 그런데 이 일이 갈수록 동력(動力)이 떨어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2015년 초 마침내 회사를 사직하고 미국 유럽 등을 여행하면서 자신을 한발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영원한 금융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 힘 있을 때 새 분야에 도전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할 때 이 두 가지를 결합할 수 있는 분야가 ‘문화(art)’라는 결론을 내렸다. 

 

▲ ‘STREET NOISE’ 전시 현장의 그래피티 낙서작품(무제)  © 김동건


최 대표는 “문화 예술은 제 유전자의 일부처럼 꾸준히 제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예술을 접하면 내면의 감동과 즐거움이 살아났어요. 직장생활에 얽매여 잠시 잊고 있었던 거죠. 주변에서 안정적인 길을 포기하고 나이 들어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는가?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제가 생각한 일이었거든요. 시대 사조(思潮)의 흐름을 읽어야 해요. 예술을 콘텐츠로 문화를 브랜드로 무장한 ‘굴뚝 없는 공장’이 선진산업의 대세라 판단했어요”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금융과 예술의 공통분모는 안목(眼目)이라고 했다. 그는 “투자은행은 뛰어난 안목으로 중개 업무를 수행하잖아요. 그때 쌓은 좋은 안목이 창업할 때 유리하게 작용했어요”라고 강조했다. 미술품은 부동산처럼 공시지가(公示地價)가 없어 그 가치로 값을 매긴다. 그 가격은 미술품이 품고 있는 콘텐츠, 즉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투자 상품과 미술품은 안목이란 열쇠에서 공통점이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의 아이템을 미술 종목으로 대체했고 이를 사업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전체 맥락은 같았다는 것이다.

 

최 대표가 예술 분야 중에서 ‘그래피티’에 주목한 것은 이것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 때문이다. 그래피티 작가 닉 워커(Nick Walker:1969~)는 “상상의 힘을 가졌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 또한 의무”라고 했다. 그는 ‘상상력의 의무’, 즉 ‘잠재된 영감(靈感)’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왜 이 시대에 그래피티인가.’ 

 

“뉴욕의 뒷골목 브롱스의 젊은이들도 꿈이 있어요. 젊음의 에너지가 폭발한 것이 힙합문화이고 그게 젊음의 아이콘이 된 거죠. 그래피티 아트는 공공 기물 파손 행위에서 80년대 장 미쉘 바스키아, 키스해링, 존 마토스 크래쉬 같은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점차 예술 장르로 받아들여졌어요. 치기(稚氣)어린 파괴 낙서쯤으로 여기던 하위문화가 순수 예술의 한 장르에서 나아가 팝아트를 잇는 차기 예술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이르렀어요.” 

 

그렇게 보면 미술사에서 새로운 사조의 출현은 당대에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인상파 화가 마네(Manet:1832~1883)가 나체 그림 ‘올렝피아’(1863년ㆍ오르세 미술관)를 선보였을 때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뒤이어 고전 미술부터 르네상스로, 인상파, 표현주의, 입체파, 추상미술도 마찬가지로 혹독한 신고식(검증과정)을 거쳤다. 이들의 진가는 한 세기 후에야 나타난다. 최 대표는 이어서 “이제 팝-아트에서 그래피티의 시대로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연은 위대한 낙서라고 했듯이 인간이 품은 천연(天然)의 예술 능력은 위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그래피티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예술이 지나온 흔적을 훑어봤다. 그는 “예술의 민주화, 다시 말해 진정한 민주주의는 대중의 문화 예술적 갈증을 충족시켜 줘야 합니다. 문화아트는 대중화를 위한 첨병입니다. 과거 동서양 주제를 보면 음악과 미술은 신(神)을, 다음은 왕과 왕족을, 귀족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다가 인상파 화가 반 고흐, 폴 고갱 등은 평민을 대상으로 삼았고,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 김홍도에 와서 일반백성을 소재로 한 풍속화가 유행했잖습니까. 음악도 오페라가 뮤지컬로, 오케스트라가 밴드로 진전을 이뤘죠. 점점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여기에 문명의 발달은 표현기법의 향상을 불러왔죠. 역사를 보면 패권 국가는 문화와 아트를 손에 쥐었잖습니까. 제국주의 시대 영국 프랑스는 침략국가의 예술품을 다 가져갔고, 1ㆍ2차대전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술품을 손에 넣어야 비로소 그 나라의 혼과 정신까지 차지한다고 본거죠”라고 역설했다.

 

최 대표의 이러한 열정은 예술의 전당(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위대한 낙서전’(2016.12.9.~2017.4.30)에서 첫 열매를 맺는다.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 7인의 작품을 한데 모았어요. 유명하고 값비싼 미술품을 가져오는 판에 박힌 기획은 싫었습니다. 예술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을 글로벌 콘텐츠를 기획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 전시를 위해서 현 시대를 대표하는 그래피티 작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기획전의 가치를 피력했다고 한다. 이 전시는 세계 최초로 세대와 기법이 다른 예술인 7인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거리의 예술’에서‘미술관’으로 영주권을 획득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래피티는 계층을 초월한 전 시민의 공유물로 세계 곳곳을 누빈다. 어두운 지하철역부터 일상 곳곳은 물론 총알이 빗발치는 분쟁지역까지도 파고든다. 그래피티가 최 대표를 매료시킨 또 하나 요소로 이념 자본 인종을 넘어선 범인류적 보편성이다. 이는 현대 예술이 나아갈 방향과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면 위대한 낙서 참여작가인 쉐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1970~)는‘OBEY(오베이 자이언트)’라는 브랜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 운동 HOPE 포스터를 만들어서 세계적인 디자인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이 된 그에게 새 정부가 기획프로젝트를 제안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원래 포스터 제작도 자발적이었고, 이후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예술이 정치ㆍ이념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한 홀로서기였다. 

 

또 다른 참여 작가인 장 르네(JR:Jean Rene)도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전 세계의 빈곤ㆍ우범지대를 돌면서 오로지 사진으로 명소를 만들어 그 지역 주민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그래피티는 외풍에 흔들리지 않은 순수예술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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