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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인터뷰, 탈북피아니스트 김철웅…‘같이 사는 세상 만들자’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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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 졸업,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 출신

 

탈북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김철웅.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인 어머니, 백화점을 운영하신 할머니로부터 사랑받으며 유복하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평가받아 여덟 살에 평양무용음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 유학도 다녀온 재원이었으며, 이후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이른바 잘 나가는 부류의 신분이었다. 

 

▲ 피아니스트 김철웅  © 박명섭 기자


그런 그가 탈북을 한 것에 많은 이들이 현재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탈북계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려고 리차드클레이더만의 팝피아노곡을 연주한 것이 발단이다. 그 연주를 들은 누군가가 보위부에 신고를 한 것. 김철웅은 시말서 작성 외에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회의를 느끼게 된다. 

 

“마침 러시아 유학을 다녀 온 이후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았던 상태였다. 북한에서 외국을 나갔을 때와 외국에서 북한으로 돌아와서 바라보는 느낌이 달랐다. 약간 불편함을 느끼던 중에 그러한 일이 터지니까. 체제선전만을 위한 음악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실행에 옮겼다. 가족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집에 있던 달러를 얼마간 훔쳐서 탈북을 했는데…사실 충동적인 탈북이었다.”

 

당시 남한으로 온다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그건 반역이라는 생각이 있었기도 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러시아로 가려 했다. “압록강은 강폭이 넓기 때문에 두만강 상류를 탈출 루트로 정했다. 강폭이 아주 좁은 곳이라 건너가기 수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탈북에 성공한 그는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 목단강(牡丹江, 무단장)인근에서 살게 됐는데, 그곳에사는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거나 인정해주기는커녕, 피아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 사람들과 함께 농사일도 하고 벌목공도 하면서 난생처음 갖은 고생을 하던 중, 교회를 가면 피아노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 생활하다보니 중국선교를 위해 방문하신 한국의 목사님들에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이 국정원까지 들어갔던 것 같다. 그게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일에 실수가 있어서 두 번이나 잡혔었다. 첫 번째는 중국 공안에 잡혀서 곤봉으로 맞기도 했는데, 내가 피아니스트다보니 혹시라도 손을 다치게 될까싶어 팔짱을 끼고 맞았다. 두 번째는 북한으로 연행이 돼서 국경지역의 보위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는데, 마침 총 책임자가 아버지 후배였다. 천운처럼 그분 덕분에 다른 사람 신분으로 나오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2002년 12월 7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됐다.”   

 

29세에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처음엔 혼자 내려왔지만 3년 뒤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아버지는 그가 탈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동생이 한명 있었는데, 당시 군 생활 중이었고, 탈북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동생은 몇 년 전 탈북을 시도하다 중국에서 잡혀 다시 북송된 후 사망했다. 

      

‘탈북피아니스트’란 말이 싫었다…카네기홀 등 다수의 대형 해외공연 

 

▲ 김철웅 피아니스트  © 박명섭 기자


특이한 경력의 그가 한국에 정착하는 시기 다른 탈북자들보다 우대를 받은 게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경력이 특이하다고 해서 다른 탈북자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은 일은 없다. 모두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 다만, 사회에 나와서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는가가 중요한데, 좋은 분들을 만나다 보니 경력을 인정받고, 친분도 생겼다. 그런 부분에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원을 졸업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 정말 무서웠다. 전라도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정착을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물며 탈북자들은 어떻겠냐”며 정착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탈북피아니스트’란 말이 싫었다고 한다. 그것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본인을 깍아 내리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탈북자를 대하는 게 우호적이지도 않고 이미지도 그다지 좋지 않기에 탈북피아니스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요청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김철웅 하면 모르는데, 탈북피아니스트 김철웅 그러면 안다. 그게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겠다 싶기도 하고…지금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이니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양극화 돼 있는 정치현실 속에서 탈북자들은 어느 편으로 서려고도, 본인의 생각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20년 이상 살아보니까 이제 말을 좀 할 수 있다. 최소 10년은 지나야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 덧붙였다. 

 

한국에 온 후 지금까지 그는 연주활동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 다수의 대학 연주 및 특강, 청와대와 대기업 등의 초청연주, 방송출연 대학 강의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로 인해 연주회가 취소되거나 설 수 있는 무대가 대폭 줄어든 상황은 현실적인 어려움 이다. 

 

국내공연뿐 아니라 해외공연도 많이 했다. 2009년 4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의 독주회를 비롯, 호주의 뮤직아카데미홀, 미 국무부, 일본 왕이 거처하는 '황거(皇居, 고쿄)' 등 다수의 해외공연을 하기도 했다. 

 

탈북을 안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에 “2018년 한국에 온 삼지연관현악단 지휘자가 친구다. 그 정도 위치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워낙 자유로운 성격이다 보니 많이 튀었을 것이고 그것때문에 감옥을 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면서 웃었다. 

 

남·북의 좋은 가곡들 모아 ‘남북 가곡의 밤’콘서트 정기적으로 열고 싶어

 

▲ 아트컨버전스콘서트에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고 있는 김철웅 피아니스트 (문화저널21 DB)


김철웅은 지난해 12월 28일 진행된 2021 한국경제문화대상 시상식 2부행사로 열린 '아트컨버전스콘서트'에서 쇼팽의 녹턴 20번 피아노솔로를 연주했으며, 그의 연주로 소프라노 김은경이 북한가곡 ‘산으로바다로가자’를 열창해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는 북한 가곡에 대해 “‘임진강’, ‘산으로바다로가자’를 비롯해 자연을 노래한 곡들이 많고, 사랑을 주제로 한 곡들은 지도자를 칭송하는 정치적인 부분들이 많아 남한에서는 부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북의 좋은 가곡들을 모아서 ‘남북 가곡의 밤’콘서트를 정기적으로 열고 싶다고 말했다.

 

탈북자 입장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부모들과 같이 온 아이들에게 ‘탈북’이라는 부담을 없애주면 좋겠다. 학교엘 가면 친구들이 ‘너 때문에 군대를 가야돼’ 라고 한다는데, 너무 안타깝고 맘 아프다”면서 “선생님의 특별대우도 문제다. 숙제를 안 해갔는데, 다른 애들은 야단치면서 그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것 또한 상처가 된다”고 강조했다.

 

대안학교를 만들어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그 아이들과 남한의 아이들이 서로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뭔지를 알려주고 싶다. 바로 음악을 통해서다. 오케스트라는 서로 양보를 해야 사는 것처럼 그런 마음을 가르치고 싶다. 다음세대를 위한 그런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문화저널21 박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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